학생들은 왜 거리로 나갔나요?

△ 1960년 4월 26일 울산경찰서로 행진해 도착한 울산농림고 학생들

 

4.19 혁명이 일어난 후 울산에서 처음 거리에 나간 것은 4월 26일이었다.  울산농림고등학교(현 울산공업고등학교) 학생 150명이 선두에 섰다. 아침 일찍 학교 대신 원도심으로 이어지는 울산교 남쪽에 모인 학생들은 다리를 거너 시내시장을 거쳐 바로 울산경찰서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그 뒤로 울산여중, 여고, 울산고 등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 따랐고 울산시민들까지 가세해 3천여 명이 도심을 행진했다.  당시 상황을 담은 신문기사(마산일보)는 다음과 같이 경찰서 앞에 모인 학생들의 요구를 전한다. 

"학생데모대를 선두로 울산경찰서에 쇄도한 흥분한 학생들은 ‘피로서 찾은 자유 총칼로써 왜 빼앗느냐’ ‘선거를 다시 하자’는 구호를 소리 높이 외쳤다. 구호를 외칠 때마다 시민들은 박수를 쳤으며 상오 10시경 학생들의 요청에 데모대 앞에 나타난 경찰서장(김동흥 총경)은 학생들과 수천 명에 달하는 시민들에게 ‘자기도 과거 학생운동을 하였던 관계로 학생들의 정의에 불타는 심중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이 데모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정당한 백성의 울분의 발로라’고 말하여 데모학생들의 정기를 찬양하였다."

학생과 시민들이 가세한 시위대는  울산읍사무소(현 중앙동주민센터)를 거쳐 성남동에 있었던 자유당 사무실에 도착해 부정선거와 독재정치를 규탄하며 자유당 간판을 뜯어버렸다.  그 때 자유당 울산사무실에는 한사람의 당원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점심을 지나 오후 2시에 이르자 시위대는 더욱 증가했다.  여학생 숫자만 약 5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여자 중학생도 많이 포함되었고  학생들 뒤를 따르는 시민이 더욱 증가하여 4, 5천 명이 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행진을 시작해  울산군청(현재 울산동헌)으로 발길을 돌려 군청 정원으로 몰려 갔다. 그들은 군수를 불러내 규탄하고 부정선거의 4대원칙을 말하라고 항의를 규탄을 이어갔다.

△ 울산공업고등학교 20회 졸업앨범 사진, 마이크를 잡은 연설자를 바라보는 시민

이날의 상황을 다른 신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6일 아침 8시 정각 울산신시장에서 출발한 울산농고 학생 약 150명이 합세하여 ‘동포여 일어서라’ ‘협잡선거 물리치라’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는 등 구호를 외치면서 스크럼을 지어 시내를 행진하는가 하면 뒤따르는 군중 3천여명도 학생과 갚이 시내를 행진한 것이라 한다. 군청과 경찰서 앞에 나선 데모대원들은 ‘앞으로 공무원이 선거에 간섭할 것인가? 군수, 서장은 답변하라’ 하면서 강력한 답변을 요구하자 군수, 서장은 ‘앞으로 선거에는 공무원이 간섭않겠다’는 답변을 받고 일시 물러가더니 재차  여고, 군민, 학생 등이 합세하여 시내를 행진하면서 자유당, 반공청년단, 서울신문울산지국 등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12시경 해산한 것이라 한다."

학생들이 거리에 나온 이유는 외쳤던 구호 속에 녹아들어 있다. 

부정선거 반대. 구속된 학생 석방. 공무원 중립. 그리고 직접 행동으로 규탄했고 시민들과 합세해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한 것이다. 

4월 26일은 결국 부정선거와 독재정치의 주범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면서 끝맺음을 지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인 4월 27일에는 언양농고와 언양중학교가, 남창과 대현의 학생들 그리고 방어진에서도 학생들이 시민들과 합세해 혁명이 제대로 완수되기를 바라는 시위를 했다. 

그리고 다시 대규모로 학생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열흘이 채 되지 안았던 5월 3일이다. 이번에도 울산농림고 학생들이  앞장을 섰다. 이날 동맹휴업을 결정했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썩은 국회는 해산하라’는 데모가 3일 상오 10시부터 울산농고 학생 6백여 여명을 선두로 시작되었다. 이날 동교 학생들은 전기와 같은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질서정연하게 시가행진을 하였다. 약 한 시간 데모를 계속하고 있을 때 울산여상 및 울산제일중, 울산중학, 울산고 학생들도 합류하였다.

특히 이날 울산 고등학생들은 ‘사찰계장 규탄하자’는 프라카드를 들고 경찰서로 행진 ‘사장계장을 잡으라’는 구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이때 경찰서 간부 한사람이 나와 ‘지금 부재중’리라고 하자 학생들은 그대로 경찰서 2층 사찰계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서장실 및 사찰계의 유리창 4매를 깨드려 버렸으며 동 데모대는 시내를 일주하고 하로 1시반경에 해산하였다.

이날은 바로 울산경찰서로 달려 갔다. 외쳤던 4.19 혁명으로 국민들이 일어나게 만들었던 원흉들, 책임자들을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을산지역의 4월 19일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아래 표는<1950년대 울산지역의 선거정치와 4·19>로  석사논문(2013)을 쓴 강석헌 선생님이 정리한 것을 인용했다.

그 뒤 7월 말까지 학생들이 거리에 나서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바로 4.19 혁명이 승리한 후 새로운 정부를 꾸리는 국회의원 선거가 올바르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학생들이 또 나선 것이다.  특히 독재정치를 펼쳤던 과거 자유당 시절 인문들이 다시 후보로 나오는 것에 대해 낙선운동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아래 신문에 적히 울산지역 학생들의 구호는 매우 절절하다. "고무신 한켤레에 주권을 팔지 말자" 금권, 관권선거에 대한 규탄이었다. 

결국 학생들이 거리나온 이유는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을 되살리고, 제대로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마음 때문이다. 오히려 어른들보다 먼저 학생들이 행진의 맨 앞에 서고 몇개월 동안 계속 이어간 것은 깨어있는 지식인이란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7월 말 선거가 마무리 될 때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가 소중함, 4.19 혁명 승리가 헛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학생들에게 더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