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 선거와 울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3.15 선거는 ‘4할 사전투표’, ‘3인조·5인조 투표’, ‘야당 참관인 투표소에서 내쫓기’,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이 동반된 선거였다. 부정선거는 자의든 타의든 선거 절차를 관장하는 경찰과 공무원들의 협조·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울산에서도 경찰이 야당 인사들의 선거 참여를 방해했고, ‘자유당’, ‘반공청년단’ 완장을 찬 사람들이 투표소 주변을 장악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민주당원들은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들의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다. 3·5인조 투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돈과 금품으로 표를 매수하며 부정이 난무했던 선거 (사진출처:3.15의거기념사업회)
울산 출신 극작가이자 수필가였던 김태근(1920~2011)은 “애당초부터 부정선거로 시작하는 기라. 부정선거로 시작하니, 뭐 투표권 나눠 주는 데부터 야당 성질이 있는 거는 안 나눠줘 버리고, 또 여당 사람 나눠주고. 한 사람 두 사람 바로 하는 것도 못 믿으니까, 3인조 5인조 조로 짜가지고, 책임자가 하나 있어가 몰고 가서, 보는 앞에서 투표해야 되고. 이런 식까지 다했다고”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울산지역사 연구-노인>, 김태근, 2002년 12월 18일 구술). 울산에서도 3·5인조 투표와 야당 성향 주민의 투표권 탈취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3인조·5인조 투표와 야당 표 탈취 양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울산시의회 초대 의장을 지낸 김팔용의 구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15 선거 당시 야당 인사인 최영근의 일을 돕고 있던 김팔용은 부산에 있다가 투표하러 신정동 본가로 왔다고 한다. 그는 “우리 할마이 장가거든. … 그때 3인조, 서이서 조 짜가 무조건 1번 찍는다. … 우리 집사람이 여기 이웃 아주머니들 서이(하고) 가서, 우리 집사람이 대장이라. 가서 이기붕을 찍어야 하는데, 전부 장면을 다 찍어버린 거라. 교실 위에 뚫어 놓고 순사가 내려다보는 거야. 그래 순경이 내려와 가지고 우리 마누라 볼때기 다 맞고, 동네 구장도 우리 할마이 때문에 두드려 맞고 그랬어요. 나는 못 들어가고 도망가고, 갔으면 난 죽었지. 야당 성향의 사람은 아예 투표 행위 자체를 못 했지”라고 당시를 기억한다(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 <구술로 그려낸 기억 속의 울산>, 2017). 3인조·5인조 투표와 경찰의 폭력적인 개입뿐 아니라 야당 지지 투표 방해가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불법행위를 목격한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 시민들은 저항하기 시작했고, 경찰을 비롯한 행정 조직뿐 아니라 정치권력과 밀착된 반공단체를 장악하고 있던 이승만 정부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민의 저항을 탄압했다. 마산상고 김주열의 죽음과 고려대 학생들에 대한 테러는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김주열군의 사망을 애도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여고생들(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50년대 한국 사회와 학생 세력의 등장
1960년 4월 19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거리시위에 나섰다. 전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 권력과 결탁된 ‘정치깡패’들이 테러한 사건은 대학생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제원조에 의존하던 한국경제는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원조 감소로 악화돼 실업이 늘어나는 등 한국인들의 생활 수준은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책이념으로 활용한 이승만 정부는 반대 정치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가며 탄압했다. 한편 학력이 사회적 계층 상승의 유일한 통로로 인식되면서 교육열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사회변혁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학생 세력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다.
1950년대 당시 교육의 핵심은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주장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교육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현실사회에서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마저 무시되고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1952년 부산 정치파동,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 1954년 ‘사사오입사건’ 등의 정치 파행이 계속됐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는 학교라고 다르지 않았다. 1957년 서울대에서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의 부정 입학에 대한 동맹휴학과 홍익대 부실재단 철거 요구, 성균관대의 재단 부패 규탄 결의 등 학원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문리대 ‘신진회’, 서울대 법대 ‘신조회’, 고려대 법대 ‘협진회’, 부산지역 ‘암장’ 등 학생조직이 결성됐다. 4.19 혁명의 핵심적인 주도계층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출처: 3.15의거 기념사업회
4월 19일, 광화문 일대가 학생과 시민들로 가득 찼다. 시위대는 대통령의 직무실이 있는 경무대로 몰려갔다. 경찰은 경무대 앞을 소방차 등으로 막아 저지선을 마련하고,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무차별 진압했다. 경찰의 폭력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의 강경 대응에도 시위대가 늘어나면서 결국 바리케이드를 넘었다. 위기감을 느낀 경찰은 오후 1시 30분경,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21명이 사망하고 17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울산농림고등학교 출신으로 한양대에 다니고 있던 정임석이 있었다.
4월 19일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부정선거와 정부의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울산의 경우에는 4월 26일 처음 시위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의 4.19 혁명이 늦어진 것은 선거 과정의 공포 분위기가 작용해 민주당원의 활동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데다, 조직화된 학생 세력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월 25일 이후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 이후 초등학생까지 시위에 나설 정도로 전국에서 시위가 다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25일 정임석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임석이 졸업한 울산농림고 학생들이 대통령 하야와 관권선거를 규탄하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사진출처: 동아일보 1960년 4월 27일 신문 보도기사
원영미(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객원교수)
울산저널 기고글 "울산의 4.19 혁명" 중에서. 원문보기